금정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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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동 역사와 유래 현재위치 >> HOME..금정산성마을..마을안내..마을역사와유래

금정산성은 사적 제215호인 우리나라 최대의 산성으로 금성동(金城洞)의 명칭은 금정산성 안의 동네라는 뜻에서 비롯된 것이다.

금정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이라는 흔적은 있으나, 오늘날의 성은 조선시대 축성 논의에 따라 축성되었다.

효종 때 동래부사 임의백(任義伯)이 금정산에 성을 쌓을 것을 건의하였고, 현종 8년(1667) 현종이 통제사 이지형(李枝馨)을 불러 왜구를 방어할 책략을 지시하였다

그 후 숙종 27년(1701) 경상감사 조태동(趙泰東)이 상계(上啓)하자 숙종이 동의하면서 축성되기 시작하였다. 조정의 동의를 얻은 조태동은 동래부사 박태항(朴太恒)에게 공사를 주관하도록 하여 본격적으로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금성동은 죽전(竹田).중리(中里).공해의 3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죽전마을은 화살을 만드는 대나무가 많이 생산되어 붙여진 이름이고, 중리마을은 중성문이 있었기 때문에 불리어진 이름이다. 공해마을은 공해란 말이 관아를 뜻하며 산성 내의 좌기청, 군기고, 화약고, 내동헌, 별전청 등의 관아가 위치하였던 까닭에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의 형성시기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신라 때부터 화전민과 승려들이 거주하다가 금정산성이 축조된 뒤에 현재의 마을들이 형성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동래부지(1740)』에는 산성리로 불렸으며, 조선 중기에는 북면(北面)에 속하였고 말기에는 양산군 좌이면(左耳面)에 속하기도 하였고, 한때는 동래군 서면에 속하기도 하였다. 일제 때도 부산부 좌이면에서 동래군 좌이면으로, 다시 1918년에는 동래군 구포면 금성리로 행정관할이 옮겨다녔다. 1963년 직할시 승격과 동시에 부산시에 편입되어 진구 금성동이라 하였으나, 북부출장소가 설치되자 이의 관할 하에 두었으며, 1988년 금정구의 분구로 금정구에 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1872년 지방지도에 의하여 지금의 부산교육원 자리에 아문리(亞門里)라는 마을이 존재함이 증명되었다. 금정산성 안에 있는 산성리(山城里)는 영조 16년(1740)에 편찬된 <동래부지> 각면각리원근정도조에 동래부 북면의 마을로 관문으로부터 거리는 18리(里)라 하였고, 순조 32년(1832년)에 나온 <동래부읍지> 방리조에는 동래부 북면의 마을로 관문으로부터 20리 거리라 하였다.

1914년의 부군(府郡) 폐합 때 산성리를 금성리(金城里)로 개칭한 듯하다. 이는 1899년에 발간된 <동래부읍지> 방리조에 ‘北面 山城里 距官門十八里’라 기록된 것이 1937년에 발간된 <동래군지(東萊郡誌)> 읍면동리조에는 구포면 금성리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뒤 이 산성마을은 행정구역의 개편에 따라 아래와 같이 편입되었다.

▶ 1943년 10월 1일 경상남도 동래군 구포면 금성리
▶ 1963년 1월 1일 부산직할시 부산진구 금성동
▶ 1978년 2월 15일 부산직할시 동래구 금성동
▶ 1988년 1월 1일 부산직할시 금정구 금성동
▶ 현재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금정산성 마을의 위치

금정산성마을의 위치를 보면 동경 129도2분 - 129도3분, 북위 35도13분 - 35도17분 사이에 있으며, 북쪽 끝에는 금정산(801.5m), 남쪽 끝에는 상계봉(638.2m)이 있다. 산성의 동문 표고(標高)는 410m, 남문표고는 510m, 서문 표고는 230m, 북문 표고는 580m로 되어 있어 서문 쪽 지대가 다른 성문에 비해 낮다.
그래서 1960년 전만 하여도 이 마을 주민들은 서문을 통해 구포시장(3일, 8일 개시)으로 가서 생활 필수품을 구입해 왔기 때문에, 그때는 동래 지방보다도 구포 지방과의 접촉이 잦았다고 한다.

이곳 금성동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전하는 구전에 의하면 옛날에 국(鞠)씨와 두(杜)씨 성씨를 가진 두 가족이 이 곳에 터를 잡고 살면서부터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때 이곳의 전 마을사람들이 왜군에 납치되어 가서, 한동안 마을이 텅 비어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양산 철마에 살던 장사(壯士)인 김해김씨가 이주해 오면서 다시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이곳은 예로부터 누룩생산이 유명했으며, 물맛 또한 유명하였다 한다. 동래부사가 한 모금의 산성물은 마시기 위하여 자주 이곳 금정산성마을 찾았다고 한다. 부사가 즐겨 마시던 샘물은 1960년까지만 해도 동문을 들어서서 40m 되는 지점에 있었다. 지금은 매워지고 없어졌으나 그 자리는 조그마한 웅덩이가 되어 물이 고여있다.

산성토산주는 조선시대 산성주변에 살던 화전민들인 국(鞠)씨와 두(杜)씨가 이 마을에서 처음 술을 만들었다고 한다. 따라서 산성토산주의 역사는 누룩을 만들어 생계로 삼아 온데서 유래한 것으로 족히 450여 년은 된다고 한다. 특히, 일제강점기 때는 고유의 맛을 지닌 이 막걸리가 더욱 알려져, 금정산성에서 누룩을 많이 만들고 적게 만드는 차이에 따라 부산.동래지방과 경남 일원의 쌀값이 올랐다 내렸다 할 정도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