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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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치형의 동문(東門)
금정산 주능선의 해발 400m의 잘록한 고개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성문은 금정산성을 굳게 지키는 역할 못지 않게 전망이 뛰어나 망루로서도 손색이 없다.

'정묘년(순조 7년, 1807년) 추계(秋季)에 이르러 토목공사를 잇달아 일으켜 한달 만에 동문이 완성되었다. 이듬해 정월에는 기둥과 들보를 백 리 밖에서 운반하고, 벼랑에서 낭떠러지를 깎아내는데 메고 끄는 사람이 구름처럼 많이 모여들어 만(萬) 사람이 힘을 일제히 쓰니 149일만에 서, 남, 북문의 초루(성문 위의 누각)가 완성되었다.

동래부사 오한원(吳翰源)이 금정산성 증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부설비문의 일부이다. 그 자신이 글을 짓고 썼다고 하니, 이것이 동문을 다시 세운 공식 기록인 셈이다.

동문은 동래읍성에서 가장 접근하기 쉬워 금정산성의 으뜸 관문으로 자리한다. '금정산성 부설비'의 기록에 따르면 이 동문은 1807년 음력 10월에 준공한 것이 된다. 특히 동문과 성첩(城堞)은 동래읍민이 일을 맡았고, 나머지 서, 남, 북문과 성곽은 경상감영의 71개 주(州)에서 차출한 민정(民丁)의 부역으로 이룩했다고 한다.

현재의 동문은 지금으로부터 188년 전에 동래부사 오한원이 세운 그 모습이 물론 아니다. 우리나라가 일제의 지배를 받을 때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쌓았던 이 성과 성문, 군관아시설이 일제의 만행으로 파괴되어 크게 훼손된 것이다

계곡에 세운 서문(西門)
금정산성 4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계곡에 세워진 것이 서문(西門)이다. 낙동강에서 대천(大川)을 따라 금정산성마을로 오르면 마을 입구에 이 문이 자리하고 있다. 계곡에 세운 성문답게 좀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금정산성 동문과 서문은 사제지간인 스승과 제자가 경쟁적으로 세웠다고 하였다. 동문을 스승이, 서문을 제자가 동시에 조성했다. 그 결과 제자의 실력이 스승을 능가했다는 것이 당시 주민들의 공통된 판단이었다고 한다.

실제 서문은 동문보다 규모는 작지만, 훨씬 견고하고 아름답게 지어졌다.
서문의 초루와 ㄷ자 꼴로 돌출한 성곽의 모습은 사뭇 예술적이다. 또한 서문 바로 옆으로 흘러내리는 대천(일명 화명천)에는 세 개의 아치를 이룬 수문(水門)을 크고 묵직한 돌을 쌓아 만들어 두었다.

이 수문은 금정산성에서 유일한 것으로 그 위로 성곽이 통과하게끔 해 놓았다. 좌우편에 험준한 지형의 산이 솟아있어 천연요새인 협곡에 서문과 수문을 만들었던 선현들의 지혜를 이곳에서 생생하게 지켜볼 수 있다.

서문이 위치한 곳은 금정산성 성곽 1만7,337m 가운데 해발고도가 가장 낮은 지점이다. 그러나 이 서문 좌측은 지형이 험준하여 등산로도 없는 석문(石門) 능선이며, 바른편은 역시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미치지 않는 파류봉과 연결되는 능선이다.

서문은 그 해발고도가 낮지만, 계곡을 끼고 적을 방어하기 아주 용이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은 산성마을 죽전 부락 맨 끝에서 다시 서쪽으로 500m 가량 떨어진 거리이다. 화명동의 낙동강 쪽에서 보면 금정산성마을의 관문이기도 하다.

금정산성 전체의 방위 개념으로 보면 이곳의 중요성이 크게 강조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낙동강 하구로 침입한 왜적들은 화명동에서 대천을 따라 이곳으로 공격로를 열 가능성이 가장 높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왜적들은 바다에서 바로 상륙하기도 하였지만, 다대포에서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 구포에서 만덕동으로 몰려오거나, 화명동에서 대천의 계곡을 따라 오르기도 하였다.

소박한 모습의 남문(南門)
금정산성 서문(西門)에서 대천(大川)의 상류를 끝까지 따라 오르면 남문(南門)에 닿게 된다. 이 남문은 동제봉(東帝峰)과 상계봉(上鷄峰)을 잇는 능선상의 잘록한 고개에 위치해 있다.

남문에서는 북쪽으로 고당봉이 정면으로 올려다 보이고, 남쪽으로는 백양산이 바로 건너다 보인다. 백양산과 남문 사이는 만덕고개와 만덕동이 자리한다. 지난날에는 유명한 만덕사(萬德寺)가 남문 남쪽방향에 자리잡고 있었다.
남문은 동문과 2.5km, 북문과 6.5km의 거리를 두고 있다. 또 이 남문에는 산성고개에서 도로가 이어져 있으며, 금정산 유일의 케이블카 종점과 600m 남짓한 거리여서 자동차나 케이블카를 타고 찾는 사람들이 많다. 등산로도 만덕동과 상계봉 등에서 사통팔달로 열려 있다.

남문은 그 단순하고 소박한 모습이 오히려 돋보인다. 언뜻 보면 아무런 특징도 없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이 남문은 동문이나 서문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신라(新羅)의 축조 기법이 깃들어 있다는 기록이 있어 주목된다.

현존 금정산성은 조선 숙종 29년(1703년)에 축성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동래부지' 등의 공식 기록이지만, 신라의 기법이란 이야기가 왜 등장하는가에 대한 연유는 한번 눈 여겨 볼만하다.

'부산부사(釜山府史)'라는 일본어로 쓰여진 초고 제1권에 금정산성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거기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금정산성이 원래 신라시대로부터의 성이라는 사실은 이를 세밀히 조사해 보면 알 수 있다. 즉 성의 4대문 가운데 동, 서, 양문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개수한 흔적이 완연하나 남, 북 양 문의 결구(結構)는 개수의 흔적이 있으면서도 신라의 수법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문의 내외에 둔병(屯兵)의 사타의 양식이 신라 특유의 축성기법인 반원형 층 단으로 세 겹, 다섯 겹으로 되었다.'

이 사실을 지적한 '금정산성 전돈대지 발굴조사개보'는 그러한 '정확한 사타가 무엇을 지칭하는지 불명하기 때문에' 금정산성의 신라 축성설 제창의 특유기법을 지금의 남, 북 양 문에서 찾기란 쉽지가 않다고 하였다. 전문 학자들도 불명이라는데, 일반 사람들이야 더욱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투박하고 거친 북문(北門)
금정산성 북문(北門)은 범어사에서 서쪽으로 1.6km, 금정산 주봉인 고당봉의 남쪽 0.9km 지점에 있다. 고당봉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린 주능선이 원효봉을 향해 다시 치켜 오르려는 잘록한 안부에 자리하고 있다.

금정산성 4문 가운데 북문이 가장 투박하고 거칠다. 이 성문에는 아치형의 장식도 없고, 규모도 다른 성문보다 작다. 직사각형의 석문에 누각과 성곽을 마지못해 형식적으로 세운 듯한 느낌마저 준다. 그러나 이 투박한 모습이 오히려 금정산성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

금정산성은 임진란의 혹독한 피해를 입은 동래 부민들이 난리에 대비하기 위하여 쌓은 피란겸 항전성이다. 임진란에 있어서 동래가 차지하는 위치는 다른 고을에 비할 수 없이 중요했다. 나라의 관문이라는 지리적 조건에서 난리의 발생과 함께 적의 첫 상륙지점으로 제일 먼저 전화(戰禍)를 나누고 굳센 항전을 전개한 곳이며,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또 난리의 장기화에 따라 적의 교두보로서 오랜 수난이 계속된 곳이기도 하다.'(금정산성 전돈대지 발굴조사개보)

이런 상황에서 축성한 금정산성의 성문이라면 미적(美的) 감각을 동원할 수 있는 겨를이 없었음이 오히려 당연하다. 투박하고 거칠며 모양새가 없는 북문에서 금정산성의 실체를 아주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 북문은 복원 작업도 다른 성문들에 밀려 부산시가 가장 뒤늦게 하였다.
4대 망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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